Book Review: 변화하고 있는 선교(저자: 데이비드 보쉬), 9장 전반부(pp405-435)
*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고 있는 선교: 선교신학의 패러다임 변천.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0, 2010. 405-435.
제9장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선교
1. 계몽주의 세계관의 형상들
- 계몽주의(啓蒙主義)란 17, 18세기에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계몽사상이라고도 부른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미신적인 면과 독단적인 해석에 대해 반란하였다. 대신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성은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나 자명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 했으며 진보를 확신토록 했다.
-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 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
- 카톨릭 신학과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보다 더 효과적으로 계몽주의의 영향을 막아내고, 더 오랫동안 살아남았는데, 카톨릭은 사실상 제2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계몽주의에 대한 반응을 “연기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틴어: Concilium Vaticanum Secundum)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로마 가톨릭이 장차 앞으로 나아갈 길을 타진한 공의회이다. 로마 가톨릭의 외부적 갱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목적이다.
- 그 결과 카톨릭은 20세기에 두 개의 패러다임의 변화-계몽주의와 포스트모던 시대-의 영향을 동시에 받아야만 했다.
- 이와는 반대로 개신교의 경우, 사실상 18세기 이후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계몽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 중세와 중세의 세계관이 해체되기 시작하는 조짐들이 14세기까지 거슬러 관찰될 수 있다 할지라도, “현대” 또는 계몽주의 시대는 단지 17세기에 시작되었다.
- 중세의 우주론: 하나님è 교회è 왕들과 귀족들è 백성들è 동물, 식물과 사물
- 르네상스, 개신교 종교개혁과 기타: 하나님è 왕è 백성
- 혁명의 시대(주로 18세기): 하나님è 일반 시민
- 과학의 시대에 하나님은 사회의 구조에서 제거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소 놀랐으나,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과 교회를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든 “초자연적인” 권위(하나님, 교회와 왕)가 사라지자, 그때에 사람들은 인간 아래의 존재들, 동물, 식물과 사물들을 바라보며 삶의 참됨과 의미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의 존재와 타당성을 더 이상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끌어냈다.
- 계몽주의 전통을 특징지은 두 개의 과학적인 접근: 베이컨의 경험론, 데카르트의 합리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계몽주의 패러다임의 일곱 특징들>
(1) 계몽주의는 이성의 시대였다.
(2) 계몽주의는 주체-객체 구조와 함께 기능했다.
(3) 과학에서의 목적의 제거와 실재 이해의 단서로서의 직접적인 인과율의 도입.
(4) 진보에 대한 계몽주의의 신앙
(5) 과학적인 지식은 사실적이고, 가치가 배제되어 있고, 중립적인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6) 계몽주의 패러다임에서 모든 문제들은 원칙적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
(7) 계몽주의는 사람들을 해방되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간주했다.
- 계몽주의의 중심 신조는 인간에 대한 신뢰였다.
- 개인은 자신들을 하나님과 교회의 간섭에서 해방된 것으로 경험하여 더 이상 특권계층을 합리화할 필요가 없었다.
-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게 태어났고 동등한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종교가 아닌 “자연”에서 나온 것이었다.
- 인간은 한편 하나님보다 더 중요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은 동물과 식물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개인들은 또한 기계로 전락되어, 그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기를 추구하는 자들에 의해 조정되고 착취되게 되었다. 뉴비긴의 주장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막시즘은 인간을 자율적인 개인들로 보는 계몽주의의 이러한 관점에서 파생된 것이다.
2. 계몽주의와 기독교 신앙
- 현대의 주된 특징은 철저한 인간 중심사상이다.
- 계몽주의 이전에, 삶은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법률, 사회질서, 공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사적인 정신, 철학적인 사상, 예술 등 이 모든 것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종교적으로 각인되었다.
- 우리의 문화와 예전의 모든 문화들을 구분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가 공적인 철학에 있어서 무신론적이라는 점이다.
-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l 사람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자로 느낀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가?
l 사람들이 자신들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창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은 아직도 활동하시는가?
l 하나님은 아직도 섭리와 은혜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l 하나님은 신적 권위로 세상에 선포하는 교회를 세울 수가 있는가?
- 인간 존재의 근원이었던 계시는 지금 그의 진리와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새로운 신학 분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기독교 변증학
- 계몽주의는 대체로 이 세상에서의 종교의 위치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배타적인 주장들을 철저하게 상대화시켰다.
- 중세에는 타종교가 “종교”로서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종교”는 “신앙과 행위의 체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 단어는 지금 복수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기독교 신앙은 여러 “종교들” 중 한 종교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다른 종교와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 교회의 전통적인 어휘가 그 신학적인 내용을 상실한 것을 또한 의미했다.
- 계몽주의 정신에 대항한 경우에도 기독교는 계몽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에 미친 계몽주의의 영향>
(1) 이성이 또한 기독교 신학에서도 중요한 것이 되었다.
(2) 종교의 사유화: 공식적인 삶이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자신을 위해서 작은 영역을 마련한 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3) 신학 자체를 계몽주의에서 말하는 과학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4) 기독교가 공식적인 종교가 되고 정부 뿐만 아니라 공직자들이 종교적인 원칙과 계명들을 신앙해야만 하는 “기독교 사회”를 건설함으로써 종교가 주권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5) 계몽주의의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분리는 또한 신학에도 적용되었다. 특히 학자들이 점점 자신의 시대와 성경 기록의 시대간의 역사적인 차이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이 일이 일어났다.
(6) 모든 문제들은 원칙적으로 해결가능하다는 계몽주의의 원리는 똑같이 신학과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교리는 기적들과 설명할 수 없는 모든 형태의 사건들을 제거시켰다. 갈릴레오는 물질계를 그의 미래의 현상들이 예측될 수 있고,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완전히 아는 사람에 의해 통제될 수 있는 완전한 기계로 간주했다.
(7) 모든 사람은 해방된 자율적인 개인이라는 계몽주의의 원리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개인주의가 빠르게 침투하여 퍼지고 있다. 그 영향은 계속되어, 각 개인이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알 수 있는 권리 뿐만 아니라 능력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주변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개인들이 해방되고 독립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스스로 결정했다.
- 향수의 차원에서 계몽주의 이전의 세계관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익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계몽주의 패러다임이 유익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으로 나가 필요한 주의와 비판을 가지고서 그 안에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새로운 패러다임 내로 흡수해야 한다.
- 계몽주의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과 풍요를 누리는 세상을 창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사람들은 전례 없이 두려움과 좌절의 희생자들이 되었다.
3. 계몽주의의 그늘에 있는 선교
(1) 교회와 국가
- 콘스탄틴 시대 이후로 교회와 국가간의 공생관계가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중세에 교황과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사이의 상호 독립으로 나타났다.
- 계몽주의 패러다임에서 교회와 국가간의 동맹은 점점 공격을 받았다: 결국 그러한 연합이 수용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2) 갱신의 동력들
- 영어권 세계에 영적인 변화와 현재까지도 선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세 가지 요소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대각성, 감리교의 태동, 영국 국교회에서의 복음적인 부흥
- 역사가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대각성을 1726년과 1760년 사이에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부흥들인 대각성과 대략 1787년에서 1825년까지 지속된 복음적인 부흥으로 구분한다.
-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대각성 운동들은 각각 선교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첫 번째 각성은 비록 그것이 선교사역의 기초들을 놓았다 할 지라도, 직접적으로 선교 활동들을 일으키지 못했다.
- 아메리카 식민지에서의 대각성보다 감리교는 더 분명하게 계몽주의의 영향을 나타냈다.
- 감리교도들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국내”와 “해외” 선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 감리교는 앵글리칸 교회에 충실하면서 안으로부터 교회를 개혁하고자 한 점에서 감리교와 구분되었던 복음적인 앵글리칸들(성공회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3) 두 번째 각성
- 감리교, 침례교와 장로교회들은 미국 혁명(독립)의 결과 획기적인 성장을 경험했다. 1800년이 되자 신자들의 비율은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증가하여, 1970년에는 최절정기로 온 국민의 약 60퍼센트가 신자가 되었다.
- 첫 번째 대각성과 달리 두 번째 각성은 북아메리카에 새로운 시작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실질적으로 첫 번째 각성에서 유익을 얻고, 그것을 회고하고, 그의 실패와 단명함에서 교훈을 얻고, 그의 목표를 강화하고, 유래 없이 새롭게 방출된 동력을 다양한 사역들, 특히 국내선교와 해외선교에 공급했다.
- 비국교도들인 복음주의자들은, “국가” 교회들이 자신의 나라들에 존재하는 가난한 자들의 곤경 또는 유럽의 식민지가 된 땅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미치는 식민 정책들의 악영향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에 반해서, 가난한 자들과 식민지의 원주민들에 대한 구원론적인 강조들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삶을 일시적으로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 복음주의 운동은, 특히 대부분의 서구 기독교와 대체로 합리주의 정신에 굴복한 교회의 삶과 비교할 때에, 계몽주의 지성의 틀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 어떤 면에서는 대안을 제시했다.
(4) 19세기
- 종교적인 색채가 다시 역사에 첨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넓은 개념보다는 좁은 민족주의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다.
- 점차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국가에서 존경받는 권력층이 되었고, 선교사들은 그들의 의도와 상관 없이 서구 제국주의 확장의 주창자들이 되었다.
-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와 같은 세속주의의 표현들은 기독교의 상징으로 칭송되었다.
- 노예제도와 억압 그리고 전쟁과 같은 악들이 줄어들게 되면서 과학, 기술과 지식이 미증유의 성취를 산출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 다른 한편 점점 미국 교회들의 해외선교는 미국 문화의 혜택들과 삶의 방식을 세계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되었다.
(5) 20세기
- 20세기 초가 되자 개혁파의 후천년설에서 사회복음으로의 전환이 완성되었다. 죄가 무지와 동일시되었고 지식과 자비가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믿어졌다.
- 북아메리카의 “주류” 개신교의 다른 분파는 계속해서 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견지했다. 이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그 분파들은 점점 전천년설을 지지했다.
- 계몽주의가 북아메리카 교회들을 덮치면서, 청교도주의에서 시작되어 후천년설의 복음주의에서 꽃을 피운 북아메리카의 개신교는 분열되었으며, 한 진영은 전천년설을 선택하여 근본주의로 발전했다.
<끝>